2003년 가을, 독일 슈투트가르트 인근 아우토반에서 빨간색 벤츠 SL600을 몰아보는 호사를 누린 적이 있습니다. 400마력의 넘치는 힘에 미끈하게 잘 생긴 외모까지 갖춘 투도어 스포츠카였습니다. 특히 급격한 코너링에서도 바닥에 착 붙어 돌아가는 대목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동승했던 벤츠 본사 직원이 그러더군요. “추월차로로 들어가보라.” 왜 그럴까 싶어 왼쪽 방향지시등을 켜고 추월차로로 진입하자, 약속이나 한 듯 앞쪽 5, 6대 차들이 일제히 오른쪽 차로로 비켜주더군요. 그만큼 그 SL600이 외모에서 풍기는 포스부터가 장난이 아니었던 겁니다.
흔히 말합니다. 꽉 막힌 서울 도심에서 제로백이 어떻고, 순간 가속력이라 할 토크가 어떻고, 이게 무슨 필요가 있냐고요. 다 스펙 놀음에 자기과시 아니냐고요. 그러나 이러한 SL600 주행 경험은 한가지 깨달음을 줬습니다. ‘가능성’. 이게 핵심이라는 것. 꽉 막힌 도심에서 벗어나 시원한 도로를 만난다면 제로백 5초의 진가가 나온다는 가능성, 어떤 이유에서건 아차 싶어 튀어나가고 싶을 때 가차없이 튀어나갈 수 있다는 그 가능성, 예기치 못한 위험상황에서 소중한 나를 지켜줄 그 듬직한 가능성. 1년에 몇 번 겪어보지도 못할 이러한 ‘가능성’(그래서 이 가능성은 결국 ‘능력’입니다) 때문에 그 비싼 차들을 향해 남자들은 죽을 때까지 로망을 갖는 게 아닐까요?
오디오도 엇비슷한 것 같습니다. 특히 최종적으로 사운드를 울려주는 스피커, 특히 화려한 스펙과 높은 가격대의 스피커에 대해 사람들은 비아냥대곤 합니다. 한국 아파트 주거환경에서 그 스피커 제대로 틀 수나 있겠어? 사운드를 듣겠다는 거야, 음악을 듣겠다는 거야? 이에 대한 저의 대답 역시 ‘가능성’이자 ‘능력’입니다. 주인이 설사 게인만 높고 다이나믹스는 낮은 가요만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몸 안에서는 언제나 광대역 주파수응답 특성과 과도특성, 다이나믹스, 대역 밸런스를 끊임없이 대기시키고 있을 그 스피커의 준비된 가능성이 전부라고요. 1년에 딱 한 번, 정말 절실한 그날에 기다렸다는 듯 천변만변하는 음악소스를 남김없이 전해줄 그 듬직한 한 방에 스피커의 모든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라고요.
이 쓸데없이 긴 잡설은 최근 시청한 독일 오디오피직(Audio Physic)의 Virgo25 때문입니다. ‘비르고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내 오디오파일들이 칭송해마지 않는 바로 그 비르고 말입니다(정말 개인적으로는 아래 하이엔드 라인인 Tempo25도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이 오디오피직의 레퍼런스 라인 서열 3위 3웨이 스피커 비르고25를 만지고 보고 들으면서 제 눈앞에는 그 때 아우토반을 한 시간 가량 달렸던 SL600의 미끈한 환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청음환경은 이랬습니다.
①소스기 = 맥북프로(오디르바나 플러스+아이튠즈)
②DAC = 브리카스티 M1 DAC
③USB&DC 전원장치 = BOP L12
④DAC 받침대 = 시너지스틱 Tranquility Base
⑤프리앰프 = 스펙트랄 DMC-30 SS
⑥파워앰프 = 스펙트랄 DMA 360 S2
⑦스피커 = 오디오피직 Virgo25
외관과 스펙
사실, 비르고25의 외모는 날렵하거나 외계 비행물체 같은 스포츠카 풍채는 아닙니다. 오디오파일 남편이 만약 비르고25를 집에 들여놓고 아내에게 가격을 말해준다면 한소리 들을 게 뻔합니다. B&W 다이아몬드802나 801의 멋진 근위병 모습도, 아방가르드의 초현실적 풍취도, 탄노이나 하베스, 스펜더의 클래식 가구 느낌도, 아발론이나 린의 행위예술가적 외관도 아니니까요. 키는 104.5cm에 불과하고, 앞면 폭도 23cm밖에 안됩니다. 게다가 뒤로 약간(7도) 건방지게 누워있기까지 합니다. 유닛도 앞에서 보면 달랑 2개, 그것도 위쪽에 왕창 뭉쳐있습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가격이 2배나 높은데도 템포25와 유닛이 모두 똑같다는 겁니다. 하여간, 이러면 반칙 아닌가, 의구심이 끊이질 않습니다.
올해 초 템포25에 큰 감명을 받은 터라, 비르고25 외관을 ‘동생’ 템포25와 조금은 꼼꼼하게 비교해봤습니다. 다음은 제가 두 형제를 육안으로 직접 비교, 작성한 메모입니다.(해당 항목 괄호안은 오디오피직 홈페이지를 참조한 내용)
①트위터 = 같은 1.75인치 HHCT2를 쓴다. 콘형 트위터이지만 돔형으로 보이게 하는 더스트 캡도 똑같다. 그런데 템포25에서 보였던 배플 지지용 나사 4개가 비르고25에서는 육안으로 보이질 않는다.(Hyper Holographic Cone Tweeter. 안쪽에서 흰색 플라스틱 나사 4개로 고정)
②미드레인지 = 같은 5.9인치 HHCM을 쓴다. 페이즈 플러그도 똑같다. 그런데 템포25에서 보였던 나사 3개가 역시 보이질 않는다. 대신 전면 배플이 18.7cm에서 23cm로 늘어나는 덕에 템포25에서 양 옆이 수직으로 잘렸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비르고25의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유닛 모두 검은색 알루미늄 플레이트에 고정됐다. 특히 미드레인지는 플레이트 안쪽으로 파고들어간 형상이다.(Hyper Holographic Cone Midrange. 안쪽에서 나사로 고정.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유닛 모두 캐비넷 공진 방지를 위한 SSC 서스페션 공법으로 부착. 또한 내부 열 확산과 공진방지를 위한 플라스틱과 알루미늄의 더블 바스켓 구조 채택)
③우퍼 = 덮개를 열어보진 못했지만 측면에 7인치 우퍼 1발씩을 장착한 것은 템포25와 똑같다. 덮개가 템포25에선 긴 타원형, 비르고25에선 평행사변형 모습이다.(세 유닛 모두 세라믹 코팅 알루미늄 진동판 사용. 오디오피직에서 Active Cone Damping2라 부르는 댐핑재 도포. 세 유닛 모두 독자 내부격실에 탑재)
④포트 = 템포25 후면에 있던 큼지막한 포트가 비르고25에선 밑면(바닥면)으로 내려갔다.
⑤후방 기울기 = 모두 7도씩 뒤로 기울어졌다.(트위터와 미드레인지, 두 유닛의 미세한 재생 사운드 시간차 극복)
⑥덩치 = 뒤로 갈수록 조금씩 넓어지고 후면이 곡선 형태인 것은 엇비슷하다. 대신 비르고25가 4.5cm 더 크고, 4.3cm 더 넓고, 8cm 더 깊다. 위에서 보면 중지 손톱(템포25)과 엄지 손톱(비르고25) 양상이다. 무게? 비르고25가 10kg 더 많이 나간다.
⑦하단 지지대 = 일반적인 스파이크 대신 VCT 발 사용.(Vibration Control Terminal. SSC 서스펜션 공법 사용)
맞습니다. 비르고25와 템포25는 결국 유닛과 전략은 동일해 보입니다. 전면 좁디좁은 배플로 회절을 최소화시키고, 트위터와 미드레인지를 바싹 붙여놓아 점음원 재생 효과를 노리며, 측면 우퍼 2발로 음장감을 높이려는 바로 그 ‘전략’ 말입니다. 두 모델의 스펙상의 수치도 아주 크게 차이가 나진 않습니다. 비르고25의 주파수응답특성 저역 하한이 30Hz로 템포25보다 2Hz 더 밑으로 내려갔다는 것만 빼놓고는 고역 상한(40kHz), 임피던스(4옴), 감도(89dB) 모두 동일합니다.
하지만 유닛의 캐비넷 접합방식이 다르고, 케비넷 자체가 더 크고 무거워 두 모델의 인상은 확 다릅니다(뒤에 기술하겠지만 음악재생 성향 역시 크게 다릅니다. 이때 비로소 비르고25의 스포츠카 질주 본능이랄까, DNA가 발현됩니다). 어쨌든 외관만 놓고 본다면 템포25가 ‘수줍음 많이 타는 여동생’, 비르고25가 ‘세상 많이 아는 큰오빠’ 그런 느낌입니다. 하긴, 비르고 시리즈는 템포 시리즈보다 훨씬 많은 풍파를 겪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템포는 1986년 처음 나올 때부터 뒤로 경사진 모습을 유지했지만, 비르고는 2007년 비르고5 때에야 비로소 7도 뒤로 눕혀졌습니다. 또한 앞서 비르고2 시절(1995년)에는 앞면에 포트가 있었고, 비르고3(2001년) 때는 포트 대신 패시브 라디에이터가 우퍼 위에, 그러니까 한 측면에 유닛 2개씩 한 스피커당 무려 4개가 달리기도 했습니다.
청음
자, 미국 스펙트랄 앰프에 물린 독일 비르고25는 어떤 소리를 들려줄까요. 결론부터 말해봅니다. 설계와 스펙, 외관에서 받았던 가장 큰 인상 혹은 선입견이 ‘반(反) 공진-혼탁’(유닛구조, SSC, ACD2, 알루미늄 플레이트, 캐비넷구조, VCT), ‘정확성’(7도 기울기, 알루미늄 진동판, 내부 독자격실), ‘음장 지향형’(측면우퍼)이었는데 이게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템포25가 승차감(음악성) 좋은 중형 세단이라면, 비르고25는 역시나 태생적으로 노면굴곡을 가감없이 전해주며 질주하는 퍼포먼스형 대형 스포츠카 느낌입니다.
①대역밸런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저역-중역-고역의 대역밸런스입니다. 광대역 주파수응답 특성과 스피드를 자랑하는 스펙트랄 프리/파워 앰프 덕도 봤겠지만, 특히 정면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측면 우퍼 2발과 밑면의 포트에서 뿜어져나오는 비르고25 저역의 공기감은 대단합니다. 7인치 알루미늄 우퍼에서, 높이 1미터를 간신히 넘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캐비넷 크기에서 어떻게 이런 풍윤한 베이스가 빠져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샤를 뮌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RCA, 1959) 1악장 2번째 파트가 시작하자마자 웬만한 스피커에서는 좀체 들을 수 없는 오르간의 초저역이 너무 쉽게 들립니다. 성당에서 울리는 듯한(사실은 보스턴 심포니홀에서 녹음) 오르간의 저역이 계속 바닥에 깔리니까 음악이 천상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제니퍼 원스의 ‘Way Down Deep’(Private Music, 1992)에서는 베이스 드럼 소리가 아예 스피커를 뚫고 나와 바닥에 쿵 쿵 떨어져 내려옵니다. 이 곡에서 들리는 특유의 ‘방울뱀 떠는 소리’가 있는데 얘들 방울뱀마저 컨디션이 좋은 듯합니다. 사정없이 떨어댑니다. 비발디의 ‘사계’(디복스, 1992) 봄 악장에서는 줄리아노 카르미뇰라가 작정하고 바이올린 줄을 끊어버릴 기세입니다. 박주원의 ‘승리의 티키타카’(2013) 후반부에서 들리는 박주원의 메탈 기타와 킥드럼 반주는 그야말로 폭주 수준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베이스가 나대거나 지저분한 것은 아니고 리드미컬하고 단정합니다. 단정하다 보니 깨끗하고, 깨끗하다 보니 중역, 고역이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리듬감’이라는 발판을 만들어 줍니다. ‘야생화’(2014)를 부르는 박효신의 목소리가 이날 따라 유난히 스피커 바깥에서 들리고, 제니퍼 원스의 치찰음마저 선명히 들린 것도 이러한 양질의 저역이 받쳐줬기 때문이겠죠.
②스테이징 이미지/투명도
또 하나, 비르고25가 만들어내는 스테이징 이미지랄까 음장감은 거의 홀로그래픽 수준입니다. 제니퍼 원스의 ‘Rock You Gently’를 트니까 그녀가 어느새 무대 한 가운데에 서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소름돋았습니다. 목소리는 인위적이고 위압적인 빅마우스 느낌이 아니라 딱 실제 사람 크기로 재즈바에서 편안히 들리는 그런 목소리입니다. 같은 앨범의 2번 트랙 ‘Somewhere, Somebody’ 사운드의 입체감은 예술입니다. 왜 오디오피직이 자사 트위터와 미드레인지에 ‘Holographic’을 쓰는지, 그것도 모자라 앞에 ‘Hyper’까지 붙였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은 위층 박스석에 앉아 보스턴 심포니 홀을 내려다보는 느낌입니다. 지휘자 카를 뮌슈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빼곡한 무대가 무지 넓게 펼쳐집니다.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1번(피레스, 뒤메이, 지안왕, DG, 1995) 1악장에서는 각 악기의 위치가 눈에 보이듯 선명합니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피아노가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 지안왕의 첼로가 우수에 찬 선율로 오른쪽 약간 앞에서 등장합니다. 그러더니 곧바로 오귀스탱 뒤메이가 왼쪽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활기있게 들려줍니다. 에이비슨 앙상블이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린, 2012)를 24비트 음원으로 듣다가는 무릎을 탁 치고 말았습니다. 스테이징 이미지와도 관련되는 부분인데, 여름 1악장 뻐꾸기 우는 소리가 저 멀리 숲에서 ‘진짜로’ 들리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뻐꾸기가 울어대는 한 여름의 간이역, 그 적막함을 깨려는 듯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비구름과 태풍의 긴장감이 생생합니다. 왜 사계 여름편이 단조인지 몸이 알 것 같습니다.
③음색
음색은 곧 듣는 맛입니다. 이 음색(timbre) 혹은 질감(texture)의 자연스러운 재생을 오디오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1번에서는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 각 악기의 음색이 더할나위없이 있는 그대로 재현됩니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피아노는 처음 들을 때는 다른 두 악기에 비해 존재감이 약한 게 사실인데, 비르고25는 명료한 타건음을 통해 ‘내가 피아노야’를 처음부터 외칩니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나댄다는 게 아니라, 제 목소리 누가 큰지 아웅대는 두 동생을 달래는 나이든 언니 같습니다.
생상스 오르간 교향곡의 목관에서는 잘 만든 카스테라의 달콤함이, 관악 파트에서는 무기질 왕창 들어간 싱싱한 채소의 맛이 느껴집니다. 에이비슨 앙상블의 여름 2악장 바이올린 소리에서는 식욕마저 감돕니다. 스탄 겟츠의 ‘Thou Swell’(1951)에서는 영롱한 피아노와 호방한 테너 색소폰이 재즈 특유의 업비트 리듬을 선사하는 베이스에 실려 청음실을 배회합니다. 박주원의 ‘캡틴 No.7’(2013)에서는 손가락 힘을 키운 박주원의 명징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곧 다가올 청명한 가을 하늘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비르고25는, 한여름 붉은 조명 아래 청음실에 자리잡고 있던 비르고25는, 어느새, 파랗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는 SL600이 돼 있었습니다.
Specification |
Dimensions |
1045 mm / 41.1" H x 230 mm / 9.1" W x 400 mm / 15.7" D |
Required Space Width x Depth |
330x470 mm / 13x18.5" |
Weight |
30 kg |
Recommended amplifier power |
30-180 W |
Impedance |
4 Ohm |
Frequency range |
32 Hz - 40 kHz |
Sensitivity |
89 dB |
Audio Physic VIRGO 25 |
수입사 |
다웅 |
수입사 연락처 |
02-597-4100 |
수입사 홈페이지 |
http://www.audioland.com |
원문출처 : 하이파이클럽( 링크 )